![[디카시 명작선-16] 원서정 시인의 디카시 ‘빈자리’](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akaoTalk_20261107_204254801-819x1024.jpg)
철조망 너머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다. 겹겹이 얽힌 철조망과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 낡은 표지판 하나가 서 있다. 표지판에는 ‘임진각’이라는 이름과 함께 개성 22km, 서울 53km라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개성은 왼쪽으로, 서울은 오른쪽으로 향한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사이에 분단의 현실이 놓여 있다. 숫자로 표시된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그 길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현실은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아득하게 만든다.
원서정 시인의 디카시 ‘빈자리’는 이러한 풍경에서 출발한다.
“그림자만 종착역에 내리고
종일 머물던 빛마저 떠난 자리”
시인은 임진각의 풍경을 단순한 분단의 상징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은 그림자와 빛의 움직임을 통해 부재의 정서를 드러낸다.
특히 ‘그림자만 종착역에 내리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그림자는 본래 사람이나 사물에 기대어 생겨나는 존재다. 그런데 시인은 사람이 아닌 그림자가 종착역에 내린다고 표현한다.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 흔적만 남아 있는 풍경이다.
이어지는 ‘종일 머물던 빛마저 떠난 자리’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빈자리의 의미가 깊어진다. 그림자에 이어 빛마저 사라지면서 그곳에는 한층 짙은 적막이 내려앉는다.
“멈춰 선 표지판 위로
바람의 목소리만 맴돈다”
마지막 두 행에서 시인의 시선은 사진 속 표지판으로 돌아온다. 표지판은 여전히 개성과 서울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 앞에서 길은 자유롭게 이어지지 못한다.
‘멈춰 선 표지판’이라는 표현에는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모습과 함께 오랫동안 멈춰 있는 분단의 시간이 겹쳐진다. 그 위를 맴도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바람의 목소리뿐이다.
여기서 바람은 중요한 시적 역할을 한다. 철조망은 사람의 발길을 막지만 바람까지 가로막지는 못한다. 시인은 바람을 통해 막혀 있는 길과 그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연의 모습을 은연중에 대비시킨다.
이 작품의 제목 ‘빈자리’는 시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다. 사진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철조망과 표지판, 하늘과 땅이다. 그러나 시인이 발견한 것은 눈앞의 사물이 아니라 그곳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다.
그 빈자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자리일 수도 있고, 자유롭게 오가던 길의 자리일 수도 있다. 나아가 오랜 분단으로 인해 우리 삶에서 사라진 평범한 일상의 자리로까지 의미가 확장된다.
원서정 시인의 ‘빈자리’가 지닌 문학적 성취는 역사적 현실을 직접 설명하거나 통일의 당위성을 외치지 않는 데 있다. 그림자와 빛, 표지판과 바람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에 정서를 담아 독자가 스스로 분단의 아픔을 느끼도록 한다.
특히 ‘종착역에 내리고’라는 의인적 표현과 ‘바람의 목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는 정지된 사진에 시간과 움직임, 소리를 불어넣는다. 사진에 없는 이야기를 무리하게 덧붙이기보다 사진 속 풍경에서 출발해 시적 상상력을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디카시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개성까지 22km, 서울까지 53km.
표지판의 숫자는 거리를 알려주지만, 그 길을 오갈 수 없는 사람들의 기다림까지 헤아리지는 못한다.
오늘도 임진각의 표지판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누군가의 발길을 기다리는 빈자리가 남아 있다.
원서정 시인의 ‘빈자리’는 그 말없는 기다림을 네 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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