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미희 칼럼니스트

두 개의 시계를 차고 사는 사람
일하며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손목에 시계를 두 개 차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는 회사의 시계여서 마감과 회의, 보고 시간에 맞춰 돌아갑니다. 다른 하나는 돌봄의 시계여서 식사와 약, 병원 예약, 그리고 언제 걸려 올지 모르는 전화에 맞춰 움직입니다. 두 시계는 좀처럼 같은 속도로 가지 않고, 그 어긋남을 맞추는 일이 고스란히 한 사람의 몫이 됩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흔한 장면이 있습니다. 중요한 회의 중에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뜹니다. 받을 수도 받지 않을 수도 없어 잠깐 망설이는 사이 회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퇴근길에는 장을 보고 약국에 들르고, 집에 오면 저녁상을 차립니다. 그러다 늦은 밤 노트북을 다시 열며 ‘나는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내려앉습니다.
저도 부모님을 돌보던 시절, 회사에 있으면 집이 미안하고 집에 있으면 일이 미안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미안함은 게을러서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를 모두 놓지 않으려는 책임감이 커서 생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두 시계가 어긋나는 것은 당신의 실패가 아니라 이 일의 원래 모습이고, 그걸 인정하는 데서 숨 쉴 틈이 생겨납니다.
혼자 버티는 것이 답이 아닌 이유
돌봄을 하는 많은 분이 회사에 집안 사정을 꺼내기를 어려워합니다. 사적인 일로 비칠까, 일에 소홀한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차를 쪼개 쓰고, 점심시간에 병원에 다녀오고,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자리에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은 변수 하나에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흔들리기 쉽습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같은 일이 생겨도 훨씬 덜 흔들립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갑자기 병원에 가셔야 하는 날을 떠올려 보세요. 미리 이야기해 둔 동료나 팀장이 있다면 ‘오늘 오후는 제가 챙길게요’라는 한마디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급히 자리를 비우는 일 자체가 설명하기 어려운 부담이 됩니다. 모든 사정을 털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있어서 가끔 급한 연락이 올 수 있다’ 정도만 전해 두어도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제도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가족돌봄휴가제, 가족돌봄휴직제처럼 일하는 사람이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가 있습니다. 자세한 조건과 절차는 사람과 직장마다 다를 수 있으니, 회사 인사 담당자나 공공 상담 창구에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사는 지역의 돌봄 관련 서비스도 함께 알아보세요. 도움을 구하는 일은 약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버티기 위한 준비입니다.
현관에서 마음을 갈아입는 연습
일과 돌봄이 뒤섞이면 사람은 하루 종일 두 역할을 동시에 붙들고 있게 됩니다. 회사에서는 집 걱정을 하고 집에서는 업무 메시지를 확인합니다. 어느 한 곳에도 온전히 있지 못하니, 같은 시간을 보내도 쉬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마음을 갈아입는 작은 경계선입니다. 옷을 갈아입듯 마음에도 지금부터는 이 자리에 있겠다는 신호를 줄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경계선으로 현관을 자주 떠올립니다. 아침에 서류가방을 드는 순간을 돌봄에서 일로 넘어가는 문턱으로 삼는 것입니다. 무릎담요를 개어 제자리에 두면서 ‘오늘 아침 돌봄은 여기까지 잘했다’고 속으로 한 번 말해 봅니다. 저녁에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을 때는 반대로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고 말해 봅니다. 별것 아닌 듯해도, 이렇게 장면을 정해 두면 마음이 따라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생활에서 쓸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부모님 일정과 약 복용 시간을 한 장의 종이나 휴대전화 메모에 모아 두고, 다른 가족과 함께 볼 수 있게 나눠 두세요. 돌봄 관련 연락을 받기 편한 시간대를 가족과 미리 정해 두면, 업무 중에 오는 연락도 꼭 필요한 것으로 추려집니다. 업무 메시지도 집에서 확인할 시간을 하루 한두 번으로 정해 보세요. 경계선이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기댈 곳이 생깁니다.
두 자리 사이에 나를 위한 자리를 하나 더
일과 돌봄을 함께 하는 사람의 하루에서 가장 먼저 빠지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남는 시간이 없으니 나를 위한 일은 언제나 나중으로 밀립니다. 하지만 돌보는 사람이 지치면 일도 돌봄도 함께 흔들립니다. 그러니 나를 챙기는 시간은 사치가 아니라 두 자리를 오래 지키기 위한 기초 공사에 가깝습니다. 길지 않아도 됩니다. 하루에 몇 분이면 충분합니다.
출근 전 현관에서, 점심을 먹은 뒤 책상 앞에서, 부모님이 잠드신 늦은 저녁 식탁에서, 아주 짧게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아로마테라피스트로 일하며 제가 자주 권하는 것은 그 순간에 좋아하는 향 하나를 곁에 두는 일입니다. 손수건에 마음에 드는 향을 한 방울 떨어뜨려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틈이 날 때 꺼내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 보세요. 익숙한 향은 바쁜 하루 속에서 기분을 다독이고,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작은 신호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향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는 시간, 퇴근길에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걷는 시간,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끝까지 듣는 시간도 모두 나를 위한 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남는 시간이 아니라 미리 정해 두는 시간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달력에 부모님 병원 예약을 적듯 나를 위한 10분도 적어 두세요. 그렇게 쓰고 나면 그 시간을 지키는 일이 조금 덜 미안해집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하루
일과 돌봄을 함께 하다 보면 모든 것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보고서도 흠 없이, 부모님 식사도 정성껏, 집안일도 빠짐없이 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 기준을 매일 지키려 하면 결국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돌봄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절을 건너며 이어지는 일입니다. 오래 가려면 기준을 조금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떤 날은 저녁을 반찬가게 음식으로 차릴 수도 있고, 어떤 날은 메일 답장을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날 스스로를 탓하기보다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고 말해 주세요. 부모님께도 늘 밝은 얼굴만 보여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때로는 ‘오늘은 엄마가 좀 피곤하네요’ 하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서로를 더 편하게 하기도 합니다.
잘 해낸 일보다 놓친 일이 먼저 떠오르는 밤이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오늘 지켜 낸 것을 하나씩 세어 보세요. 부모님이 식사를 하셨고, 나는 출근을 했고, 이렇게 하루를 끝까지 왔습니다. 두 자리를 함께 지킨다는 건 매일 완벽하게 해낸다는 뜻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음 날 다시 현관에 선다는 뜻입니다. 그 꾸준함이야말로 당신이 이미 해내고 있는 일입니다.
오늘의 마음돌봄 실천
★☆☆[오늘 바로 – 현관 문턱 숨 고르기, 1분] ①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전, 서류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려 섭니다. ② 두 손을 배 위에 가볍게 얹고, 코로 천천히 넷을 세며 숨을 들이쉽니다. ③ 입으로 여섯을 세며 길게 내쉬면서 어깨를 툭 떨어뜨립니다. ④ 이렇게 세 번 반복한 뒤 ‘아침 돌봄은 여기까지, 이제 일하러 간다’고 소리 내거나 속으로 말합니다. ⑤ 가방을 들고 문을 엽니다. 저녁에 돌아와서는 같은 동작을 하고 ‘일은 내일에게’라고 말해 보세요. 들숨보다 날숨을 길게 하면 몸이 조금 느긋해지고, 짧은 말 한마디가 마음의 자리를 옮기는 신호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한 걸음 더 – 향기 손수건 만들기] ① 깨끗한 면 손수건을 한 장 준비합니다. ② 평소 좋아하는 향(라벤더, 오렌지처럼 부드러운 향이면 좋아요)의 에센셜 오일을 손수건 한쪽 모서리에 딱 한 방울만 떨어뜨립니다. ③ 손수건을 접어 지퍼 봉투에 넣고 가방에 챙깁니다. ④ 업무 중 마음이 분주할 때, 혹은 부모님 전화를 받고 난 뒤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서 한 뼘쯤 떨어뜨린 채 천천히 세 번 숨을 쉽니다. ⑤ 다시 접어 넣고 하던 일로 돌아갑니다. 익숙한 향 하나를 정해 두면 정신없는 하루 중에도 잠시 나에게 돌아오는 작은 쉼표가 되어 줄 수 있어요.
★★★[여유가 될 때 – 일주일 돌봄 지도 그리기] ① 주말 중 30분 정도 조용한 시간을 냅니다. ② 큰 종이를 한 장 펴고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칸을 나눕니다. ③ 각 칸에 내 업무 일정, 부모님 병원·약·식사 일정을 서로 다른 색 펜으로 적습니다. ④ 두 일정이 겹치는 곳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시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옆에 적어 봅니다. ⑤ 마지막으로 빈칸 어딘가에 ‘나를 위한 10분’을 초록색으로 적어 넣습니다. ⑥ 완성한 지도를 냉장고에 붙이거나 사진으로 찍어 가족과 나눕니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걱정을 종이 위로 꺼내 놓으면 막막함이 조금 줄고, 함께 나눌 일도 눈에 보이게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에센셜 오일은 원액을 피부에 직접 바르지 마시고, 향에 예민하시거나 불편해하는 가족이 있다면 사용을 멈춰 주세요. 지친 마음이나 잠, 입맛의 변화가 오래 이어진다면 혼자 견디지 마시고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 상담 창구에 꼭 이야기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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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마테라피스트·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병원동행매니저 자격을 가진 김미희 칼럼니스트는 부모님을 직접 돌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돌봄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글을 씁니다. 코리안투데이 인천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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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기자: incheonsouth@thekoreantod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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