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23화: 원효와 의상 – 신라 불교의 두 거장](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t20261106093318-ehdnnd.png)
같은 길을 떠났던 두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은 길 위에서 돌아섰고, 다른 한 사람은 바다를 건넜습니다.
한 사람은 박을 두드리며 저잣거리를 누볐고, 다른 한 사람은 산중에 절을 세워 제자를 길렀습니다. 원효(617~686)와 의상(625~702)은 신라 불교를 이끈 두 거장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교를 펼친 덕분에 ‘해동(海東) 불교’라는 말이 가능해졌습니다. 해동은 바다 동쪽, 곧 신라를 가리킵니다.
종교가 소수 지식인의 학문에 머물 것인가, 모든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외래 사상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소화할 것인가. 천수백 년 전 신라 승려들이 던진 이 물음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 시대의 풍경
7세기 동아시아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신라는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무너뜨렸고, 이어 당나라 세력과 맞서 싸운 끝에 670년대 중반 한반도 대부분을 지켜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백성이 죽었고, 남은 이들은 고통 속에서 위로와 구원을 찾았습니다.
두 승려는 일찍부터 당나라 유학을 꿈꾸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원효와 의상은 650년경 육로로 입당을 시도하다 고구려 국경에서 붙잡혀 돌아왔고, 661년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이때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했으며, 의상은 홀로 바다를 건너 종남산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웠습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시기와 입당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이 글에서는 ‘660~670년 무렵’으로 두루 표기합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아 보리라.”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당 고종 시기 장안은 불교 학문의 중심이었습니다. 지엄과 그 제자 법장(643~712)이 화엄종을 체계화했고, 같은 시기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674~678년 무렵 이슬람 세력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을 ‘그리스의 불’로 막아냈습니다. 661년에는 우마이야 칼리파조가 열렸습니다.
🌏 기타 지역
일본에서는 672년 임신의 난으로 덴무 천황이 즉위해 율령 국가의 틀을 다졌습니다. 신라 승려들의 저술은 이후 일본 불교계에서도 읽혔습니다.
두 거장의 길 – 입당(入唐) 시도와 신라의 사찰
唐 (당)
종남산 (지엄)
新羅 (신라)
경주 · 분황사
부석사 (676)
의상: 바다 건너 유학 (660년대)
원효: 도중에 돌아섬
원효 617~686 · 의상 625~702
650년경 육로 시도 실패 → 661년 재도전 → 갈림길
[도해: 원효와 의상의 유학 시도 경로와 주요 사찰 (개념도, 축척 없음)]
🌙 그날의 현장
“비 내리는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목이 말라 손을 더듬어 찾은 바가지의 물은 달고 시원했다. 날이 밝아 보니 그곳은 무덤가였고, 바가지는 해골이었다.”
“원효는 속이 뒤집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젯밤에는 아무렇지 않던 물이 오늘은 구역질이 나는 까닭은 물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것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다. 그는 당나라로 갈 까닭이 없다고 보고 발길을 돌렸다.”
※ 해골물 일화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 편찬된 《송고승전》 등에 전하는 설화적 서사입니다. 장면은 그 전승을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원효는 ‘걸림 없음’을 몸으로 보여준 승려입니다. 《삼국유사》는 그가 광대들이 가지고 놀던 큰 박을 본뜬 도구에 ‘무애(無碍)’라는 이름을 붙이고,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마다 다니며 교화했다고 전합니다. 그 덕분에 가난한 이들도 ‘나무아미타불’을 입에 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귀족 중심이던 불교가 백성의 종교로 내려온 순간입니다. 그가 거리에서 직접 부른 ‘무애가’의 가사가 온전히 남은 것은 아닙니다.
원효의 진짜 무기는 붓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썼습니다. 현재 전하는 저술이 십수 부에 이르고, 그중 《대승기신론소》는 중국과 일본에서 ‘해동소(海東疏)’라 불리며 널리 읽혔습니다.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입니다.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오므로, 서로 다투는 교리도 더 높은 자리에서 보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생각입니다. 《십문화쟁론》은 이 정신으로 여러 종파의 주장을 조화시키려 한 저작이지만, 지금은 일부만 전합니다.
의상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당나라 종남산에서 지엄에게 화엄을 배우고 돌아와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습니다. 이 책은 210자의 시로 화엄의 핵심을 압축한 것으로, 글자를 도형 모양의 길로 이어 놓은 독특한 구성입니다. 《삼국유사》「의상전교」는 그가 태백산 등 여러 산에 화엄 사찰을 세워 가르침을 전했다고 기록하며,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6년(676) 부석사 창건 관련 기록이 전합니다. 의상의 화엄은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세계관으로, 왕 아래 모든 신분이 하나의 질서로 묶이던 통일 신라의 시대정신과도 맞닿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관음 신앙과 미타 신앙을 함께 펼쳐 백성과의 거리를 좁혔다고 평가됩니다.
시대
7세기 후반 (삼국통일기)
핵심 인물
원효(617~686), 의상(625~702)
핵심 사상
일심·화쟁 / 화엄일승
영향
해동 불교의 독자성, 불교의 대중화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원효는 화쟁을 통해 불교 이론을 종합한 사상가이자 대중 교화자로, 의상은 화엄 교단을 세운 체계가로 평가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한 관계로 봅니다.
대안적 견해
해골물 일화나 요석공주와의 설화는 후대 전승의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또 원효 저술이 중국에 알려지는 과정에는 시차가 있었다는 연구가 있어, ‘곧바로 대륙을 흔들었다’는 서술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원효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누구의 종교인가’입니다. 그는 어려운 교리를 노래와 춤에 담아 문턱을 낮췄습니다. 오늘 복잡한 지식을 쉬운 말로 풀어 대중과 나누려는 모든 시도가 그의 후예입니다. 그의 화쟁은 갈등이 깊은 사회에서 서로의 주장을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공통인가’로 다시 읽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의상이 던진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입니다. 사상이 사람과 장소, 제도로 이어져야 오래 남는다는 점을 부석사와 제자 공동체가 보여 줍니다. 두 사람 모두 중국에서 배운 불교를 그대로 옮기지 않고 신라의 현실에 맞게 다시 짰습니다. 사상의 자주성은 배타가 아니라 소화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 구분 | 신라 시대 | 현재 |
|---|---|---|
| 사회/통합 | 전쟁으로 갈라진 민심을 일심과 화쟁으로 아우름 | 세대·지역·이념 갈등 속의 사회 통합 담론 |
| 외래 사상 수용 | 당 불교를 배우되 해동의 해석으로 재구성 | 글로벌 지식을 받아들여 고유한 콘텐츠로 재창작 |
| 문화/정신 | 저잣거리의 무애가, 산중의 화엄 학당 | 대중 강연과 온라인 인문학, 템플스테이 |
두 갈래의 길, 하나의 강 – 신라에서 오늘까지
원효
대중 · 화쟁 · 무애
의상
체계 · 화엄 · 교단
해동 불교
사상의 자주성
쉬운 말로 나누는 지식
차이를 아우르는 대화
오래 남는 공동체
[도해: 원효의 대중화와 의상의 체계화가 만든 해동 불교, 그리고 오늘의 과제]
📚 더 깊이 알아보기
- 경북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중심 사찰로,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 부석사에는 의상을 사모한 선묘 낭자가 용이 되어 도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절 이름 ‘부석(浮石)’은 공중에 떠 있었다는 바위에서 비롯했다고 전해지며, 사료가 아닌 설화입니다.
-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의상전교」, 《삼국사기》 권46 설총전, 《송고승전》의 원효·의상 전기를 비교해 읽어 보세요.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원효는 문턱을 낮췄고 의상은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대중과 체계, 자유와 질서라는 두 힘이 만났기에 불교는 신라의 것이 되었습니다. 다름을 하나로 엮는 힘이 한 사회의 사상을 만듭니다.
“박 하나로 거리를 울리고, 산 하나로 천 년을 세웠다 – 신라 정신은 영원하다.”
이전 편
제22화: 석굴암 – 천년의 미소
다음 편
제24화: 설총과 강수 – 신라의 학문
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신라 편 (총 35편)
© 2025 The Korean Today. All rights reserved.
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 PNG 다운로드
스마트폰의 WIA Code 스캐너로 이 화면을 약 33초 비추면 기사 전체가 폰에 저장됩니다 — 인터넷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WIA Code 스캐너 열기
![[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22화: 석굴암 – 천년의 미소](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t20261105093305-90zfdo-768x432.png)

![[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21화: 경덕왕과 불국사 – 불교 예술의 꽃](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t20261104093306-86gshz-768x432.png)
![[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20화: 성덕왕 시대 – 통일신라의 전성기, 35년의 평화가 남긴 것](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t20261103093305-onftqj-768x432.png)
![[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19화: 신문왕의 개혁 – 전제왕권 확립](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2026/11/kt20261102093305-wac39o-768x432.png)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