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16화: 고구려 정벌 – 668년 평양성 함락](https://www.thekorean.today/wp-content/uploads/ins/imgdata/smilestory_kr/202610/2026103033088151.jpg)
통일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는 일일까, 아니면 하나의 삶터에 함께 사는 일일까. 668년 평양성 성문이 열린 날, 이 질문이 1,350년 넘게 이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660년 백제가 무너진 뒤 신라의 시선은 북쪽으로 향했다. 700년 가까이 요동과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당 태종의 親征(친정)까지 막아낸 나라, 그 마지막 8년의 이야기가 오늘의 주제다.
강대국 고구려는 왜 안에서부터 무너졌을까. 그리고 신라는 이 승리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흔히 ‘삼국통일’이라 부르는 이 사건의 명암을 함께 따라가 보자.
◆ 시대의 풍경
신라와 당의 동맹은 648년 김춘추가 당 태종을 만나 맺은 약속에서 시작됐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두 나라는 곧바로 고구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661~662년 당군의 평양성 포위는 혹독한 추위와 보급난으로 실패했고, 신라는 김유신이 이끈 군량 수송으로 간신히 당군을 도왔다. 고구려는 그만큼 단단한 나라였다.
균열은 안에서 생겼다. 665~666년경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자 아들 남생·남건·남산 형제가 권력을 다투었다. 쫓긴 남생은 당에 투항해 길잡이가 되었고, 그의 동생 연정토는 12성을 들어 신라에 귀부했다. 당은 667년부터 요동의 성을 하나씩 무너뜨렸고, 668년 6월 신라에도 출병을 요청했다. 문무왕은 한성(漢城)까지 올라가 군사를 모아 지휘했고, 김인문 등이 당군 진영에서 신라 군사를 이끌었다.
(요지) 연개소문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물과 물고기처럼 화합하고, 벼슬을 두고 다투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그가 죽자 형제의 다툼이 곧 나라의 위기로 번졌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당 고종(재위 649~683)의 시대.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무너뜨린 당은 영토가 가장 넓어졌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옛 고구려 땅을 직접 통치하려 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에서 암살되고(668) 콘스탄티누스 4세가 즉위했다. 곧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674~678)이 이어졌다.
🌏 기타 지역
일본은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을 돕다 크게 패한 뒤 방어를 강화했고, 667년 오미(近江)로 도읍을 옮겼다. 668년 덴지 천황이 즉위했다.
[이미지: 668년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협공 개념도 (지형은 도식화)]
⚔️ 그날의 현장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끊긴 지 오래였다. 한 달이 넘는 포위 끝에 성 안의 곡식은 바닥났고, 병사들은 성문 밖을 가득 메운 당과 신라의 깃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상 재구성) 마침내 성문이 열렸다. 대막리지 남건은 끝까지 싸우려 했으나, 성문을 맡은 승려 신성(信誠)이 적과 내통해 문을 열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나약한 왕 보장은 항복의 예를 올렸고, 평양의 오래된 하늘이 그날 저물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평양성은 668년 9월(음력)에 함락됐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하순 무렵이며, 자료에 따라 날짜 표기가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총사령관은 당의 이적(李勣)이었고, 신라는 문무왕이 한성에서 지원을 총괄하고 김인문 등이 현장 지휘를 맡았다. 한편 노쇠한 김유신은 출정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평양성 앞에 서지는 않았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5부 176성, 약 70만 호의 대국이었다고 전한다. 이 큰 나라가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연개소문 사후의 권력 분열이다. 여기에 오랜 전쟁의 피로, 요동 방어선의 붕괴, 유력자였던 남생의 투항이 겹쳤다. 고고학적으로도 요동과 압록강 유역 산성의 방어 체계가 당군의 집중 공격에 차례로 무너진 흔적이 확인된다.
전쟁이 끝나자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고구려 땅을 9도독부로 나누려 했다. 보장왕과 왕족, 귀족 수만 명은 당으로 끌려갔다. 신라가 얻은 것은 ‘적의 소멸’이었지만, 곧이어 당이 신라마저 지배하려 들면서 동맹은 전쟁(나당전쟁)으로 바뀐다. 통일의 완성은 668년이 아니라 그 뒤 몇 년에 걸쳐 결정된다.
시대
668년 (7세기 후반)
핵심 인물
문무왕, 이적, 연남생, 보장왕
핵심 사건
평양성 함락, 고구려 멸망
영향
삼국 정립 종료, 나당 갈등 시작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668년을 삼국통일의 분기점으로 보되, 대동강~원산만 이남만 차지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평가가 많다. 외세를 끌어들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을 몰아내 자주성을 지켰다고 본다.
대안적 견해
고구려 옛 땅 대부분을 잃었으므로 ‘통일’보다 신라의 영토 확대로 부르고, 발해까지 포함한 ‘남북국 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668년의 통일은 ‘민족 통일’이라기보다 정치적 통합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신라인·고구려인·백제인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 구분이 하나의 ‘우리’로 녹아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양성이 열린 날이 곧 하나 됨의 날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통일을 이야기할 때 던져야 할 질문도 같다. 선을 지우는 것이 통일일까, 서로 다른 삶을 존중하며 신뢰를 쌓는 것이 통일일까. 외세와의 동맹이 가져온 기회와 대가, 그리고 내부 분열이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 구분 | 신라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세 나라가 경쟁, 정복으로 통합 | 분단 체제, 평화적 통일 논의 |
| 군사/외교 | 당과의 군사 동맹, 이후 결별 | 한미 동맹과 다자 외교 |
| 문화/정신 | 유민 포용, 화랑 정신의 확산 | K-컬처로 이어지는 공통 문화 감각 |
[이미지: 신라의 통일 과정과 현대 한국의 통일 담론]
📚 더 깊이 알아보기
- 중국 낙양에서 출토된 연남생 묘지명은 고구려 멸망 과정과 연씨 일가의 행적을 전하는 중요한 금석문 사료다.
- 670년 보장왕의 외손(또는 조카) 안승을 왕으로 세운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신라 영토 안에서 이어졌고, 신라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신라본기 문무왕 상·중, 《삼국유사》 권1 ‘태종 춘추공’ 조를 함께 읽어 볼 만하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강한 나라도 안에서 갈라지면 무너지고, 승리한 나라도 그 뒤를 준비하지 않으면 시험대에 오른다. 668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의 시작이었다.
“평양성의 문은 닫혔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쪽으로 흘러 새로운 나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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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신라 편 (총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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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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